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 | 전 세계 친구들이 생긴 32일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 | 전 세계 친구들이 생긴 32일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나기 전에는 아름다운 풍경을 기대했습니다.
끝없이 이어지는 길과 유럽의 작은 마을들, 그리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이 가장 기억에 남을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2026년 2월 5일부터 3월 8일까지 프랑스길 780km를 걸으며 가장 오래 기억에 남은 것은 풍경도, 음식도 아닌 사람들이었습니다.
국적도, 나이도, 살아온 환경도 모두 달랐지만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인연들은 지금도 제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파리 기차역에서 시작된 인연, 찰스 선배님과 스텔라 어머님
가장 기억에 남는 분들을 꼽으라면 단연 찰스 선배님과 스텔라 어머님입니다.
처음 만난 것은 산티아고 출발 전 파리 기차역이었습니다.
그때는 서로 이름도 잘 모르고 인사만 나눈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인연은 마지막 종착지인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까지 이어졌습니다.
속도는 달랐지만 대부분 비슷한 알베르게에서 만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가까워졌습니다.
두 분은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순례길을 완주하기 위해 3년 동안 준비하셨다고 했습니다.
찰스 선배님은 늘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인생을 조금 더 오래 살았으니 선배님이라고 불러."
그래서 저는 선배님이라 불렀고 스텔라님은 자연스럽게 어머님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두 분이 함께 이 긴 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공용 욕실을 사용하고, 다인실 알베르게에서 자고, 하루 수십 킬로미터를 걸으며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모습이 참 멋있어 보였습니다.
처음 파리 기차역에서 만났던 인연이 마지막 산티아고 대성당까지 이어졌다는 사실은 지금 생각해도 신기합니다.
스페인 친구 JOSE
순례길 초반에 만난 사람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친구는 스페인 발렌시아 출신의 JOSE였습니다.
1999년생이었던 JOSE는 정말 스페인 사람다운 친구였습니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고,
파티를 좋아했고,
항상 에너지가 넘쳤습니다.
JOSE 덕분에 저는 순례길에서 처음으로 스페인어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Qué tal?"(께딸)
"Buenas noches"(부에나스 노체스)
같은 기본 인사말부터 하나씩 알려주었습니다.
또 하나 기억나는 것은 와인 이야기입니다.
JOSE는 마트에서 와인을 고를 때마다 말했습니다.
"RIOJA 라벨이 붙은 레드와인은 실패할 확률이 적어."
실제로 몇 번 사서 마셔봤는데 가격도 저렴하고 맛도 좋았습니다.
그 이후로 순례길에서는 자연스럽게 RIOJA 와인을 찾게 되었습니다.
아쉽게도 JOSE는 긴 휴가를 낼 수 없어서 레온에서 순례길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순례길 초반의 즐거운 기억 속에는 언제나 JOSE가 있습니다.
현제 형과 나눴던 미래 이야기
순례길 초반 약 10일 정도를 함께 걸었던 현제 형도 기억에 남습니다.
형은 기간제 교사를 그만두고 육로 세계여행을 하고 있었습니다.
형의 꿈은 특별했습니다.
세계여행이 끝난 뒤 호주 워킹홀리데이로 돈을 모아 요트를 사고, 바다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저의 꿈은 울릉도였습니다.
사람을 좋아했던 저는 울릉도에 게스트하우스를 열어 평화롭게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귀국 후 답사까지 다녀왔지만 포기하게 되었지만 말입니다.
처음 본 사람과 과거를 이야기하고 미래를 이야기하는 것.
한국에서는 쉽게 경험하기 어려운 시간이었습니다.
즉흥적으로 떠난 진명이
진명이는 저보다 한 살 어린 친구였습니다.
IT 업계에서 일하다 퇴사했고, 거의 충동적으로 산티아고행 항공권을 예매했다고 했습니다.
처음 만난 것은 발카를로스에서 점심을 먹을 때였습니다.
조금 통통한 체형에 장발을 묶고 다녔는데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정말 웃긴 친구였습니다.
순례길 내내 함께 걷지는 않았지만 한 번씩 알베르게에서 만나 술을 마시고 밥을 먹었습니다.
어느 순간에는 어디선가 할머니에게 받은 나무 지팡이를 들고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그 지팡이를 순례길 끝까지 스틱처럼 사용하며 완주했습니다.
그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필라델피아에서 온 그렉 스노우맨
가장 고마웠던 사람을 꼽으라면 그렉 스노우맨입니다.
미국 필라델피아 출신으로 제 아버지보다 두 살 정도 어린 분이었습니다.
이미 포르투갈길을 완주한 경험도 있었습니다.
스노우맨과 함께 걷는 시간은 항상 즐거웠습니다.
그는 제 영어 수준에 맞춰 천천히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쉬운 단어를 골라 사용했고 제가 이상한 문장을 말해도 알아듣고 자연스럽게 고쳐주곤 했습니다.
함께 걸으며 가족 이야기,
미국 이야기,
여자친구 이야기,
그리고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나누었습니다.
그런 평범한 대화들이 이상하게도 오래 기억에 남습니다.
말 많고 유쾌했던 아일랜드 친구 오션

왼쪽 오션 중간 에르네스토
오션은 아일랜드 출신 친구였습니다.
정말 말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아일랜드 특유의 강한 억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알아듣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오션은 항상 분위기 메이커였습니다.
술을 좋아했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고 순례길 자체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같이 맥주를 마시고 와인을 마시며 웃었던 기억이 많습니다.
스페인어 굴림소리로 놀리던 에르네스토
에르네스토는 남미 출신 친구였습니다.
정확히 어느 나라였는지는 기억이 흐릿하지만 특유의 스페인어 굴림소리로 사람들을 놀리곤 했습니다.
에르네스토와는 순례길 이후에도 인연이 이어졌습니다.
바르셀로나에서 다시 만나 함께 관광을 하고 스테이크 뷔페도 갔습니다.
순례길에서 만난 인연이 여행이 끝난 뒤에도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친구였습니다.
마지막 축하 파티를 열어준 브라질-러시아 부부
이름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브라질 남편과 러시아 아내였다는 것은 아직도 기억합니다.
자녀들은 스페인에서 테니스를 배우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정말 국제적인 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산티아고에 도착한 뒤 이 부부는 큰 집을 빌려 순례자들을 초대했습니다.
직접 만든 음식과 와인을 준비해 작은 완주 축하 파티를 열어주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렉이 길 위에서 만난 인도 국적의 에이미, 중국 국적의 민디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순간만큼은 모두가 친구였습니다.
국적도, 언어도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같은 길을 걸어온 순례자라는 사실만 중요했습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결국 사람을 만나는 여행
많은 사람들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이야기할 때 아름다운 풍경을 떠올립니다.
물론 풍경도 좋았습니다.
음식도 좋았습니다.
완주의 성취감도 좋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돌아보면 가장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은 사람들입니다.
함께 걷고,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와인을 마시고,
함께 웃었던 사람들.
해외여행에서는 낯선 사람과 깊은 대화를 나누기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순례길에서는 자연스럽게 그렇게 됩니다.
아침에 처음 만난 사람과 저녁을 함께 먹고,
다음 날 또 만나고,
어느새 서로의 인생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산티아고 순례길이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풍경을 보는 여행이 아니라 사람을 만나는 여행.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결국 자기 자신을 만나게 되는 여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다시 산티아고를 걷게 된다면 풍경도 좋겠지만, 그 길에서 만날 새로운 사람들을 기대하며 떠날 것 같습니다.
저는 2026년 2월 5일부터 3월 8일까지 산티아고 프랑스길을 완주했습니다. 이 글은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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